향긋한 봄의 발원지, 매화마을로 향하다
겨울을 지나 해사한 얼굴로 봄을 알려오는 첫 번째 꽃, 매화. 예로부터 매화는 한낱 꽃이 아 닌 고매한 품격을 지닌 인격체에 비유되곤 하였다. 때문인지 매화에 대한 옛 선비들의 사랑은 각별했다. 바야흐로 매화가 기척을 시작하는 3월이다. 봄을 시샘하는 칼바람에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깊은 향을 흩뿌리는 매화!
그 아름다운 자태를 가장 먼저 전해주는 곳으로는 전남 광양의 매화마을을 따라올 곳이 없다.
■ 봄길 따라 매화는 피어나고~
겨우내 눈(雪) 소식에 이어 광양 매화마을은 봄으로 접어드는 춘삼월에 더욱 환한 눈 소식으로 몸살을 앓는다. 백운산 산허리를 휘감은 구름인 양 만발한 매화가 마치 함박눈이 쏟아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이다.
매화마을은 일조량이 전국에서 가장 많아 ‘햇빛고을’이라고도 불리는 전남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을 부르는 별칭이다. 매화가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는 이곳은 유유히 흐리는 섬 진강 덕분에 그 경치가 더욱 서정적이다. 특히 20여 리에 걸쳐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는 3월엔 푸른 섬진강 줄기와 순결한 흰 빛의 매화가 어우러져 환상의 절경을 연출해낸다. 매화의 자태를 서서히 가슴에 담으려면 나름의 여행 순서를 정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광양 매화마을로 떠나는 여행은 19번 도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노랫말에서처럼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차를 몰다 보면, 마치 매화마을로 안내하는 이정표인 양 하나 둘 매화 꽃송이가 시야에 들어온다. 그 소담스러운 매화 송이들을 따라가면 어느 순간 눈앞에 매화가 지천으로 펼쳐져 있다.
이때쯤 되면 시각적인 눈만 매화를 향할 것이 아니라 오감을 그곳에 맡겨두어도 좋다. 이미 감탄으로 가득한 시각 외에도 후각을 통해 폐부 깊숙이 전달되는 매화의 그윽한 향기, 버선발로 조심스레 내딛는 듯한 매화 꽃잎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어느 결에 뺨에 와 닿는 고운 입술 같은 꽃잎의 감촉 등 그야말로 매화 앞에서 오감이 열리는 생경한 경험을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19번 국도 위에서 매화에 대한 감탄을 전부 꺼내놓기엔 아직 절정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섬진대교를 건너면서 본격적으로 매화마을이 시작되는 까닭이다. 매화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이곳은 집 앞뜰과 뒤안은 물론이고 논두렁, 밭두렁 할 것 없이 온통 매화 천지다. 하늘에서 후두둑 매화나무가 쏟아진 것 마냥 땅이 있는 곳엔 어디 할 곳 없이 매화나무가 가지를 펼치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을 굳이 수치로 표현하자면 5만여 평의 대지에 30만 그루가 넘는 매화나무들이 매화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매화마을의 절정은 이 마을에 처음으로 밤나무 대신 매화나무를 심은 홍쌍리 여사가 운영하는 청매실농원에 펼쳐져 있다. 매화나무의 집단 재배를 제일 먼저 시작한 청매실농원은 150만 평 산자락에 펼쳐진 대규모의 매화나무 군락이다. 농원 입구부터 한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광활하게 펼쳐지는 매화 무리는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어쩌면 아득한 현기증을 느끼게 할 정도다.
더욱이 매화나무 아래로 푸른 청보리를 심어 대조가 선명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기에 충분하다. 파릇한 보리밭을 배경으로 피어난 청초한 빛깔의 매화 자체도 진귀한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청 매실농원에서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물은구불구불한 매화나무 끝에 마련된 2500여 개의 장독대들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매실들을 담은 긴 행렬의 장독대는 고매한 자태의 매화와 어우러져 방문객들에게 사뭇 양반가의 뜰을 산책하는 듯한 호사스러운 기분을 들게 한다.
한편 광양 매화마을의 아름다움은 매화가 한창인 때를 정해 ‘광양매화축제’라는 이름 아래 한바탕 잔치로 이어지는데 봄꽃의 개화를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축제 기간 중에는 매화를 소재로 한 다양한 볼거리, 즐길 거리가 등장하지만, 가지 끝에서 도도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매화 한 송이를 들여다보는 것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매화 본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싶다면, 축제 기간을 살짝 비껴나 매화마을을 방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고품격 꽃놀이를 위한 매화 명소들
매화 향기를 찾아가는 여행에서 전남 순천의 선암사를 지나칠 수는 없다. 이 고찰에서 수백 년을 보낸 매화나무는 그 기품이 각별해 ‘선암매’라는 이름을 지녔을 정도다. 광양마을의 매화가 꽃잎을 다 떨궈낸 후에야 하나 둘 꽃잎을 여는데 꽃송이가 작고 듬성듬성 피어나지만 순결한 색상과 자태는 매우 출중하다.
선암사에 고결한 빛깔의 백매화가 피어난다면, 전남 구례의 화엄사에는 ‘흑매’가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낸다. 흑매라고 하면 언뜻 검은 빛깔의 매화를 떠올리겠지만, 흑매란 홍매화의 빛깔이 너무도 붉어 붙은 이름이다. 특히 화엄사의 흑매는 검은 붓 끝에 붉은 물감을 적셔놓은 듯 단아하고 기품 있기로 유명하며 다른 곳의 매화와 달리 옅은 향을 지니고 있다.
한편 경남 산청은 지금의 광양 매화마을처럼 매화로 소문이 자자했던 곳으로 이곳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매화는 남사리 예담촌 하씨 고택에 뿌리를 내린 ‘원정매’다. 31대 동안 귀하게 보존되어 온 원정매는 나무 등걸이 마치 용트림 하듯 휘어져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범상 치 않은 기운을 풍긴다. 아쉽게도 수년전부터 나무둥치가 썩기 시작해 회생 불능 판정을 받았지만 최근 새 가지가 뻗어 나오고 있어 또 한 번의 영화를 기대해 봄직하다.
전남 장성의 백양사에도 입소문 난 매화가 존재한다. 예로부터 큰 스님들이 모인 도량이라는 의미로 ‘고불총림(古佛叢林)’으로 불리는 백양사의 명물, ‘고불매’가 그것이다. 홍매화로 담홍색의 빛깔도 좋지만, 무엇보다 향이 짙고 오래된 매화나무답지 않게 수많은 꽃송이는 물론 탐스러운 아름다움까지 발산한다.
3월에는 남도 쪽으로 발길을 돌려, 만개한 매화의 숲속에서 품격 다른 꽃놀이에 한번쯤 취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