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녘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을 수확하다
초록이 희미해지는 이즈음, 가을만의 원초적인 풍경을 찾아 떠나보는 건 어떨까. 문명의 편리함을 벗어나 오직 자연과 사람만이 존재하는 들녘에서, 오래전 사진첩을 들추듯 요란하지 않은 가을을 즐겨도 좋겠다.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김제에서 바다만큼이나 드넓은 평야가 누렇게 익어가는 풍경이나 사막의 모랫결처럼 자연스러움이 극치를 이루는 가천 다랭이논의 풍경 등 아날로그적인 가을을 만나러 가보자.
■ 평야, 황금빛 벼들이 넘실거리다
단풍이 수놓은 가을이 화려하고 사치스럽다면, 황금빛 벼들이 연출하는 가을은 우물처럼 웅숭깊은 서정을 담아낸다. 단풍이 자아내는 만산홍엽의 빛깔들은 금세 흩어져버릴 듯 위태롭지만, 알알이 여물어 물결을 이룬 황금빛 들녘은 자극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이러한 풍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너른 들녘이 있는 전북 김제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농익은 김제의 가을은 서해안 고속도로 서김제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김제의 도로에서 가장 먼저 다가오는 풍경은 코스모스로 도열해있는 꽃길이다. 김제시 진봉면, 광활면으로 이어지는 29번 국도를 비롯해 김제의 국도 곳곳에는 여러 빛깔의 코스모스들이 국내 최고의 코스모스 드라이브 길을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길 뒤편에는 김제에서 만날 수 있는 수확의 천국, 만경평야가 황금빛 바다를 이루고 있다.
김제에 있어 김제평야라고도 불리는 만경평야는 만경강과 동진강을 젖줄 삼은 역사 깊은 농경문화의 터전. 벼가 익어가는 모습에 따라 제각기 다른 빛깔을 뿜어내는 만경평야는 봄의 연둣빛, 여름의 진초록에 이어 가을이 되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 자연의 만추를 느끼게 한다.
만경평야에는 교과서에 등장하는 벽골제도 있다.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 때(서기 330년) 축조된 동양 최고(最古)이자 당대 최대의 저수지로 만경평야를 윤기 돌게 하는 주된 물줄기였다. 인근에는 벽골제를 쌓기 위해 동원된 백제의 일꾼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 모은 것이 산이 되었다는 신털미산도 있다.
아쉽게도 만경평야의 농사를 책임졌던 벽골제는 현재 모두 메워져 논이나 주택지로 변했고, 지금은 장생거, 장경거로 불리는 두 수문과 3킬로미터 남짓한 제방만이 남아 있다. 다행히 벽골제수리민속유물전시관에 가면 당시의 영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어디서든 황금빛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김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땅이기도 하다. 성덕면 남포리에서 시작해 광활면 창제리까지 이어지는 15킬로미터 논둑길은 그곳의 지명만큼이나 광활한 지평선을 자랑한다. 진봉면 심포리의 진봉산 역시 지평선을 보기에 적합한 장소다. 해발 72미터에 불과해 언덕이라고 해야 오히려 어울리는 진봉산 정상에는 3층 규모의 팔각정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그곳에 올라 동쪽으로 시선을 두면 논둑길에서 바라보던 지평선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풍경에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만나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절경을 묘사하는 까닭이다.
김제에서만 만날 수 있는 지평선의 아름다움은 10월 1일부터 5일까지 펼쳐지는 ‘지평선축제’를 통해 보다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농경문화를 테마로 한 지평선축제는 평야에서 맞는 농경 축제로 황금빛 들판을 가로지르는 우마차 놀이를 비롯해 지평선 논길 걷기, 농촌 가을걷이 체험 등 풍성한 가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다.
한편 김제에는 수확을 앞둔 평야 여행에서 덤이 될 명소들도 많이 있다. 먼저 야트막한 높이의 진봉산이, 바다와 접한 벼랑 위에는 서해바다에 가장 인접해 있다는 망해사가 위치해 있다. 낙조를 보기에 더없는 명소로 불리는 망해사는 해 질 무렵 이방인들의 발길이 잦아지는 사찰 중 하나. 망해사가 소박한 운치를 지녔다면 모악산 중턱에 자리한 천년고찰 금산사는 보다 장대한 가을의 풍경을 선사하는 곳이다. 국보와 보물만 11점을 보유한 금산사는 특히 국내 유일의 3층 목조 법당인 미륵전이 유명하다.
■ 가천 다랭이논, 소박하고 정겨운 가을의 동화
남해대교를 건너 앵강만을 왼쪽에 끼고 달리면 계단식 논으로 유명한 가천마을이 나온다.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고불고불한 계단 형상으로 부려진 논들은 그 자체로 독특한 볼거리를 선사하여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이곳에는 삿갓으로 덮어도 감출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논인 ‘삿갓배미’부터 300평이 넘는다 해서 붙여진 ‘큰배미’까지 생김새와 크기가 제각각인 500여 개의 논밭이 층을 이루고 있다.
전형적인 바닷가 마을에 이렇듯 태곳적 다랭이논이 자리 잡은 까닭은 앞바다의 수심이 깊고 바다가 드세 좀처럼 배를 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닷가에 살지만 땅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지리적 조건이 다랭이논을 형성한 것이다. 각 계절에 따라 다른 색감을 연출하는 다랭이논의 절정은 다름 아닌 가을. 이즈음 다랭이논은 수확을 앞두고 황금빛으로 변신한 벼들이 층층이 하나의 물결을 이루어, 바로 앞의 바다와 대조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귀한 볼거리가 되는 이 마을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3층의 돌층계 위에 탑 장식 모양을 띤 반원 모양의 돌이 올려진 ‘빱꾸디’(밥구덩이)다. 해마다 마을 사람들은 돌탑처럼 우뚝 솟아나 있는 빱꾸디에서 탑 가운데의 사각 진 구멍 속에 밥을 묻어 그 해의 풍년농사와 마을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동제를 지낸다.
이곳의 또다른 명소는 마을을 감싸 안은 설흘산이다. 설흘산의 정상인 봉수대에 서면 앵강만의 아늑함과 함께 한려수도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또한 인근의 관광명소인 금산 보리암은 기암의 틈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 바위와 쌍홍문이라는 바위굴이 눈길을 끈다.